‘반크’ 박기태 단장
대학 4학년 때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를 만들고 23년째 변함없이 활동하고 있는 박기태 단장(48)이 지난달 23일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무실에서 반크의 미래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는 “지금과 똑같이 한국 알리기 교육에 집중해 해마다 1만명 이상의 청소년 한국홍보대사를 배출하겠다”고 밝혔다.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1974년생.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를 설립했다. 1999년 대학 4학년 때 학교 수업 과제로 한국과 외국 청년들이 인터넷으로 교류하는 펜팔 사이트를 만든 게 출발이었다. 외국 지도와 교과서 등에 표기된 ‘일본해’를 ‘동해’로, ‘다케시마’를 ‘독도’로 바로잡은 성과로 널리 알려진 ‘반크’ 활동을 지금까지 23년째 지속하고 있다. 한국 바로 알리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을 넘어 세계를 변화시키는 글로벌 인재 양성에도 힘쓰고 있다. <아시아 평화를 지키는 반크의 디지털외교혁명> <나는 사이버 외교관 반크다> 등 7권의 책을 썼다.
20년간 외국인에 한국 알리기는 성공
이젠 우리의 올바른 정보 전파에 주력
혐오 대신 세계인이 공감할 팩트로
중·일 공세에 품격있고 우아하게 대응
반크 없어져도 이 일 계속되는 게 목표
연간 1만명의 청소년홍보대사 키우고
메타버스로 ‘10만 사이버 독도관’ 추진
‘반크’(VANK·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라는 이름은 이제 친숙하다. 해외의 잘못된 한국 정보를 바로잡는 활동을 하는 민간단체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권이 넘는 사회·국어 교과서에 나온다. 초·중·고교와 대학에 같은 이름의 동아리도 많다. 반크는 한국을 바로 알리는 ‘사이버 외교사절단’으로 통한다. 근래에는 일본과 중국의 한국역사 왜곡 사건 때마다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며 반대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반크는 1999년 한 청년이 대학 수업 과제로 만든 펜팔 사이트에서 시작됐다. 낮에는 빌딩 청소 아르바이트를 하고 야간대학을 다니던 가난한 취업준비생 청년,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크에 몸담고 있는 박기태 단장(48)이다. 관광 가이드를 꿈꾸며 영어 공부에 애썼던 그는 관심 주제로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드는 숙제를 받은 뒤 한국과 외국의 대학생이 온라인 친구를 맺고 대화하는 사이트를 떠올렸다고 한다. 이듬해 취업에 성공한 그는 회사에서 취미 삼아 사이트를 운영하다 과감히 사표를 내고 반크 일에 전념하기로 결심한다. 소박한 출발에 무모한 도전이었다. 2000년 5월, 반크는 남대문시장 근처의 3평짜리 사무실에 있었다. 직원 3명에 컴퓨터 2대, 회원은 3700명. 이후 반크는 청소년 참여가 늘어나면서 현재 회원이 20만명에 달한다. 그리고 20평 사무실에서 7명이 일한다.
지난달 23일 서울 보문동의 반크 사무실에서 박 단장을 만났다. 22년 만이었다. 26세 청년은 40대 후반의 아저씨로 변했지만 유쾌한 목소리는 여전했다. 파란 후드티에 검정 가죽재킷을 걸친 차림은 그해 5월의 청년 모습 같았다. 그와 반크가 20년 넘게 한길을 걸으며 활동 영역을 넓혀온 비결이 있을까 궁금했다.
- 반크 초창기와 비교하면 한국의 위상이 무척 올라갔다.
“그렇다. 당시에는 한국이 어디에 있는 나라냐는 질문이 많았다. 중국이나 일본 근처에 있다고 알면 다행이었다. 지금은 한국을 모르는 외국인이 거의 없지 않나. 글로벌 한류 팬 1억명 시대라고 한다. 해외 교과서나 지도의 표기 오류를 수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올바른 정보를 적극 전파하는 일이 더 중요해졌다.”
- 처음 목표는 무엇이었나.
“초창기 목표는 더 많은 외국인이 한국의 존재를 알게 하는 것이었다. 해외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이 목표는 거의 자동으로 이뤄졌다. 초기에 다짐을 적은 글을 다시 꺼내 봤더니, 한국이 아시아의 중심으로 우뚝 서는 앞날을 꿈꾸는 내용이었다. 그 목표는 계속 유효하다.”
- 반크는 탄탄대로만 걸었나. 위기가 없었나.
“운영 예산 부분이라면, 알뜰히 살기를 택했다. 상근직원 5~6명을 줄곧 유지하며 조직 규모를 키우지 않았다. 대가를 바라고 거액을 지원하겠다는 기업들의 제안은 모두 뿌리쳤다. 홍보물 제작비가 부족하면 웹 포스터를 만들어 배포했다. 그래서 지금은 5000여명의 정기 후원자들에 힘입어 연간 5억원 예산 규모의 자립 구조를 갖췄다.”
- 후원자와 회원이 많이 늘었다.
“20년으로 치면 1년에 1만명씩 회원이 늘어난 셈이다. 물론 20만명 모두가 계속 활발하게 활동하는 건 아니다. 주로 학생인 회원들은 가입한 해에 한두 달 정도 열심히 활동한다. 입시 부담 때문이다. 하지만 그 짧은 경험만으로도 언제든 반크를 지켜보고 응원하며 큰 힘을 준다는 게 중요하다.”
- 규모와 활동이 확대된 것 말고는 어떤 점이 달라졌나.
“일본과 중국의 역사왜곡이 심해지면서 거기에 대응하는 반크의 체급도 점점 높아졌다. 단체의 규모가 아니라 그들과 싸울 수 있는 맷집이 세지고 패기와 용기가 커진 것이다.”
- 일본과 중국은 반크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나.
“2020년 6월 ‘야후재팬’에 황당한 거짓뉴스가 나왔다. 반크가 한국 정부로부터 연간 200억원 이상의 예산을 받는 기관이고, 단장도 정부가 임명한 장관급 공무원이라는 내용이다. 한마디로 정부 사주를 받는 극단적 반일단체라는 것이다.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반크가 한국 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편견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지난해 초 보도했다. 이후 반크 사이트에 협박 메시지와 악플이 쇄도했다. 어찌 보면 반크의 힘을 두려워하는 증거일 수 있다.”
반크는 갈수록 격화하는 일본·중국의 역사왜곡 공세에 ‘품격 있고, 우아하게’ 대응할 작정이다. 물론 상대가 품격을 잃고 거칠게 달려든다면 더 강하게 비판하고 행동에 나선다. 박 단장은 “오직 명확한 사실에 입각해, 한국인뿐 아니라 세계인도 모두 옳다고 여기는 일에 함께 목소리를 내는 것이 원칙”이라고 말했다.
20여평 사무실에 단장·인턴 포함 7명, 반크 상근직원은 단출하다. 모두가 연구원이고 ‘~님’으로 부른다.
- 반크의 최근 활동이나 프로젝트를 몇 가지 꼽아달라.
“한복이 중국문화라고 왜곡하는 중국에 대응해 ‘한복 입기 챌린지’를 벌였다. 일상생활 속에서 한복을 입은 사진이나 영상을 소셜미디어에 올려 전 세계에 알리는 캠페인이다.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하려는 일본의 꼼수에 대해 디지털로 풍자 포스터를 제작해 배포했다. 3·1절을 맞아 ‘3·1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었다.”
- 이런 캠페인을 하면서 오해나 비난을 사는 경우는 없나.
“물론 있다. 차분한 캠페인을 벌일 때는 싸움에 나서라는 주문이 나오고, 발언 수위가 높아지면 자제하라는 말이 들린다. 양쪽 의견 모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에는 명백한 사실을 만인에게 납득시키는 게 관건인데 어떤 방식이 최선일지는 단체나 개인마다 판단이 다를 수 있다고 본다. 어느 단체의 과격한 행동이 반크의 것으로 오해된 적이 있는데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누구든 불필요하게 혐중·혐일을 부추기는 것은 안 될 텐데.
“맞는 말이다. 반크는 혐중·혐일이나 반중·반일을 내세우지 않는다.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팩트’를 당당한 목소리로 말하는 게 반크의 원칙일 뿐이다.”
- 시쳇말로 ‘국뽕’이나 국수주의에 대한 입장은.
“무작정 한국은 옳고 좋다 하고, 외국은 배척하는 건 명백한 잘못이다. 대마도나 만리장성이 한국 땅이라고 우기면 안 되는 것 아닌가. 그런데 일본과 중국은 이런 유의 주장을 여전히 펼치고 있다.”
- 다른 나라의 문화를 존중하며 폭넓은 연대를 추진하는 일들이 눈에 띈다.
“우선 올해 시작한 ‘역지사지’ 프로젝트가 있다. 한국의 문화유산을 타국의 비슷한 것들과 짝지어 함께 홍보하는 영상이다. 한국 고인돌과 영국 스톤헨지, 한국의 산사와 미얀마의 바간 유적지 등 10곳을 비교 설명했다. 한국 문화유산을 상대국에 친숙하게 알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는 아시아 디지털 외교 플랫폼 ‘브리지 아시아’를 열어 40억 아시아인이 합심해 글로벌 청원을 할 수 있는 장을 마련했다.”
박 단장도, 반크도 지금까지 쉴 새 없이 달려왔다. 일거리가 엄청나게 늘어났다. 한국 문화와 자연을 담은 지도·엽서 등 홍보물을 100가지나 만들었다. 건당 1000만원씩 예산을 들였으니 모두 10억원어치다. 예쁜 디자인과 실물 제작은 다양한 ‘협력기관’에서 맡아줬다. 모두 반크를 알고 한국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다.
이 홍보물은 사이버 외교사절 교육을 받는 반크 회원들이 무상으로 받아가 어딘가에서 한국을 알린다. 아프리카 짐바브웨의 시골 학교 교실에 큼직하게 걸린 한국 지도는 대학생이 된 반크 회원이 의료봉사를 하러 가서 붙인 것이다. 이게 반크의 초심인 ‘풀뿌리 한국 알리기 운동’이다. 20여년 세월이 흘렀어도 반크의 초심은 변함이 없었다.
- 지난 20여년의 성과를 돌아본다면.
“한국 바로 알리기는 잘했다. 그런데 일본과 중국은…, 우리 성과가 ‘빵점’일지도 모르겠다. 한다고는 했는데 바뀌지 않고 오히려 악화됐으니까. 일례로 2001년에는 일본의 우익 교과서 1종에만 독도가 아니라 ‘다케시마’였는데 2022년에는 모든 교과서가 그렇게 됐다.”
-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진 것인가.
“그렇지 않다. 반크가 맡아야 하는 일은 없다는 얘기다. 시민 모두가 할 일이 있을 뿐이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사이버 외교사절’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반크가 20여년간 해온 활동 자료는 모두 홈페이지와 블로그에 공개돼 있다. 반크가 당장 없어져도 이 일이 계속되는 게 우리 목표다. 반크는 특별하지 않다.”
- 모두 회원이 되라고 권하지 않는다?
“그렇다. 다들 알아서 했으면 좋겠다. 처음에는 당연히 어색한데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하면 세상을 바꿔 나갈 수 있다.”
- 향후에는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지금과 똑같이 일할 것이다, 지금껏 했던 대로 매달 반크에서 200명, 외부 특강에서 800명씩 교육해 연간 1만명 이상의 한국홍보대사를 배출할 것이다. 반크는 매달 활기찬 신입생들이 들어와 새 출발을 하는 분위기다. 매일 새로 여는 사이트와 다름없다. 그래서 20여년이 순식간에 지난 것 같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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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도 아쉽거나 부족한 점은 없나.
“메타버스 기반으로 ‘사이버 독도 전시관’ 10만개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세계 어디서든 스마트폰으로 가상공간의 전시관을 세우고 독도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메타버스로 구현한 덕수궁 석조전에 글로벌 회원들이 모이는 이벤트도 추진 중이다. 정보통신, 과학기술계가 한국 바로 알리기에 더 많이 나서주시면 좋겠다. 편지나 공문이 아니라 기술이 움직여야 할 때다.”
“역사왜곡은 당사국이 아닌 세계가 풀 숙제…한국의 ‘옮음’ 지지”
반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고 있는 프랑스 청년 클라라 다느폰. 우철훈 선임기자
반크 근무 프랑스 청년 클라라
‘반크’ 사무실에서 한 청년이 반갑게 인사했다. 클라라 다느폰(24). 프랑스인이다. 직함은 인턴. 1년 정도 반크에서 일하고 싶다며 입국해 자가격리를 마치고 지난 1월24일부터 출근했다고 한다. 먼저 한국어로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프랑스에서 온 클라라입니다. 저는 영어와 프랑스어와 이탈리아어를 할 줄 알아요. 3·1운동, 독도와 <직지심체요절>을 홍보하는 영상을 만들어 전 세계인들에게 알리는 활동을 했어요.”
2019년 이어 두 번째 자원 근무
‘직지심체요절’ 불어 동영상 제작
독립선언서 이탈리아어로 번역도
‘전생에 한국인’ 농담 들을 정도
파리 제9대학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지난해 파리 제1대학 국제경제학 석사 과정을 마친 그는 반크 근무가 두 번째다. 2019년 여름 두 달간 이미 일한 적이 있다. 프랑스에서 온라인으로 반크의 활동을 접하고 지원했다고 한다. 그는 금속활자로 만든 세계 최초의 책인 <직지심체요절>을 알리는 프랑스어 홍보 동영상을 제작하고, 3·1 독립선언서를 이탈리아어로 번역하는 일을 했다. 프랑스에서 보관 중인 <직지심체요절>을 한국에 돌려줘야 한다는 주장도 펼쳤다. 독도에 직접 가서 보고, 한국 땅 독도를 세계에 알리는 사이트도 만들었다.
이번에 와서는 한국의 경제 발전이 기적이나 행운이 아니라 유구한 역사 전통과 문화 저력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내용의 글을 썼다. 3·1절 전날에는 3·1 독립선언서를 영어로 직접 소개하는 영상을 찍어 반크 블로그에 올렸다. “3월1일은 한국인들이 독립을 위해 맞서 싸웠던 증거입니다. 저는 독립선언서 중에서 ‘오직 자유 정신을 발휘할 것이고, 결코 배타적 감정으로 치닫지 말라’는 대목에 감동받았습니다.”
그는 반크에서 일하고 싶은 이유를 “옳고 의미 있는 일을 많이 하고, 더 나은 세계를 만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역사왜곡이 나라 간의 문제가 아니라 세계 시민 모두 풀어야 할 숙제라고 했다. 한국인의 정서를 이해하고 한국의 ‘옳음’을 지지한다는 그는 전생에 한국 사람이 아니었느냐는 동료들의 농담에 빙긋 미소를 지었다.
차준철 논설위원
반크